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르후 전투 (문단 편집) === 만주 통합 === [[파일:external/www.eeloves.com/17541467be609145a8.jpg|width=500]] 이러한 [[이성량]]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천명제|누르하치]]는 차근차근 여러 준비를 마칠 수 있게 되었다. 첫 번째로는 건주여진의 통합으로, 만력 11년([[1583년]])부터 만력 17년([[1589년]])에 이르는 전쟁을 통해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해서여진을 통합하게 될 기반을 다진 것이었다. 앞서 여진에게 있어 교역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고 말한 바 있다. 이때 누르하치는 무순, 청하, 관전, 애양 등 네 곳의 관에서 명나라와 활발하게 통상을 하여 내실을 키웠는데, 교역을 하는데 문제가 되는건 안전성이었고, 이제 통합이 된 건주여진은 매우 안전했으므로 상품 유통은 아주 원활했다. 만력 19년([[1591년]]) 경에는 압록강로도 손에 넣어 [[조선]]과의 교역길까지 열게 되었다. 반면에 해서여진은 예허부와 하다부 사이의 오랜 대립으로 혼란스러웠으므로 교역로가 폐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주, 모피, 인삼 등의 교역품이 건주여진을 경유하게 되면서 각지의 상인들이 건주에 몰려들었고, 해서여진 4부는 금세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해서여진 중 가장 강력한 예허부가 앞장서서 나왔다. 예허부는 사자를 보내 누르하치에게 영토 할양을 요구했는데, 이는 사실상 시비나 다를 바 없었기에 누르하치는 화를 내며 거절했다. >'''"나는 곧 '만주'이며, 너는 곧 '후룬'이다. 너의 나라가 크다 해도, 내 어찌 취하겠는가? 내 나라가 넓다 하여도, 너 어찌 나누어 가질 수 있겠는가?"''' [[만주]]라는 단어의 어원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어찌되었건 누르하치는 이때부터 자신과 자신의 세력을 일컫어 '만주'라고 하며 개별적인 태도를 취했다. 즉 당시 누르하치에게 '만주'란 건주여진의 5개 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예허부와는 같은 나라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거절하는 태도를 취했다. 여진족이 새로이 만주족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누르하치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알 법했고, 공포심을 느낀 해서여진은 변경의 각 집단에도 호소하여 누르하치가 말한 '만주'라는 괴물을 쳐부수려고 했다. 어느 순간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이권을 저 만주라는 괴물이 집어 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모두의 이해관계가 절충된 끝에 임진왜란 중인 [[1593년]], 해서 4부족에 시버족(锡伯族) 등이 포함된 9부의 연합군이 편성되었다. 그 숫자는 30,000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 '만주'라는 정체불명의 괴물은 상상보다도 더욱 공포스러운 적이었다. 누르하치는 '''[[구러산 전투]]'''에서 9부의 연합군을 격파했고, 연합군에 가담했던 백두산의 주셔리부와 너옌부 너머로 원정을 벌여, 그 지역마저 모두 합병해 버렸다. 새롭게 깃발을 내건 만주의 기세는 꺼질 줄을 몰랐다. 이 시기, 누르하치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야망으로 인하여 200,000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조선을 침공, [[임진왜란]]이 발발했기 때문이었다. 그 직전 [[1591년]] 11월, 어사 장학명(張鶴鳴, 1551 ~ 1635)[* 같은 한자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서주(徐州)군 출신이며, 생몰연월과 직위가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명사(역사책)|명사]]》의 기록에는 경진년 문과회시(文科會試)에 합격했다는 기록만 있다.]의 주청으로 '요동의 왕' [[이성량]]이 해임되었다. 이성량이 열심히 뇌물을 먹인 유력자들이 조정을 떠난 탓에 아군이 일시적으로 없어졌던 것이 원인이었는데, 영원백이라는 작위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으나 다른 후임자들이 차례로 요동에 파견되었다. 물론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해도 이성량의 엄청난 영향력은 요동에 분명히 남아 있었고, 후임자들은 그 영향력때문에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다. 더구나 이성량이 문제가 많다고 여겨지는 사람이었지만 능력 하나 만큼은 천하의 명장이라 할 만 해서 이성량이라는 큰 기둥을 뽑은 요동은 10년 동안 군사 책임자가 8번이나 교체되는 파란을 겪었다. 이성량은 한참 후인 [[1601년]]에 노령의 나이로 다시 복귀했다. 어린 누르하치에게 있어서 이성량은 너무나 버거운 상대였다. 이성량은 요동에서 신이나 다름없었고, 누르하치가 이름을 좀 날렸다 한들 그에게 대적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였다. 그러나 이성량이 어찌되었건 실무에서 잠시 손을 떼는 모양새가 되었고, 저 멀리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함으로서 명나라의 시선은 완전히 남쪽에 고정되었다. ||[[파일:external/www.shouzou.com/hideyoshi_koudaiji.jpg|width=100%]]||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누르하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결정 때문에 정말 좋은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때마침 이성량도 개입 못할 그런 상황에서, 누르하치는 9부 연합군을 구러산 전투에서 대파하고 세력을 크게 확장시킬 절호의 찬스를 얻은 것이었다. 이성량의 후임으로 온 사람들은 저마다 모두 일이 손에 안맞아 허둥대면서 현지 사정에 대한 파악을 제대로 하는 것도 힘들어 했고, 그나마 계속 교체되었다. 누르하치는 이 기회에 자신의 세력, 즉 '만주'의 힘을 크게 늘리면서 '후룬'(해서여진 4부)을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히데요시가 야망을 버리지 않고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킬 당시에 해서 4부는 울며 겨자먹기로 강대해져가는 만주와 화약을 맺었고, 전쟁이 끝나던 [[1599년]]에는 기어코 친명파인 하다부가 만주에 항복하고 말았다. 당시 [[천명제|누르하치]]는 무엇보다 [[명나라]]와 우호관계에 있었다. [[이성량]]이 밀어준 누르하치가 아니었던가. 해서여진 4부를 굴복시켜도 명나라에 대한 반항이 아니게 되니, 저지할 만한 세력도 없었다. 그런데 이 즈음, 하다부를 예허부가 충동질했고, 하다부의 공격을 만주가 격파한 일이 있었다. 이때부터 명나라와 만주 사이의 대립이 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